off

찜 목록에 추가됐습니다.

찜 목록에서 삭제됐습니다.

부서진 룩의 반격 1~3

Rating: 
0
평점: 5
0 리뷰
BL 전체이용가 · B&M 3화 완결
“네가 필요하다, 달빛검.”
 
달콤한 말에 나는 그레이의 것이 되었다.
그레이가 필요하다기에 왕이 내린 칼로 왕국을 쪼갰다.
그레이가 원하기에 스승에게 배운 검으로 스승을 겨누었다.
선봉을 이끌어 아리베스 왕가를 쳤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변절자, 학살자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붙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 관심은 오로지 발론 후작을 새로운 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야 나는 깨달았다.
 
‘훌륭하다, 엔슬리 메이킨. 좆같은 인생을 살았구나.’
 
그레이를 도망치게 하고자 국왕군을 유인해서 낭떠러지로 떨어진 엔슬리.
그러나 깨어나 보니 열여섯, 아직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시절로 돌아왔다.
다시는 이복형 그레이 질라라드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과거에는 차갑기만 하던 그레이의 태도가 어딘가 달라졌다.
 
“내 마음이 변했다면 믿겠니?”
“뭐?”
“말을 잘 못 알아듣는구나, 엔시.
난 널 갖고 싶은데.”
더보기
저수리
 
고생 끝에 책이 나왔습니다.
이 글의 시작과 끝을 함께해 준 R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더보기
0. 학살자, 메이킨
 
나는 달리고 달렸다. 발끝에 돌부리가 채이고 질긴 나무 덩굴이 몸을 때려도 발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몸이 오르내릴 때마다 입술 사이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습한 공기에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비틀린 나무가 높은 곳에서 비웃는 것만 같았다. 적병 수천이 나를 찾아 왕의 숲을 뒤지는 마당에 고향으로 살아 돌아가기 어려울 것을 안다. 내가 절박하게 달리는 이유는 고작 생존 때문이 아니다.
“저기에 있다!”
병사 한 무리가 앞에서 달려왔다. 전부 여섯이었다. 말없이 칼로 화답했다. 감각은 왕국 군을 멀리 유인해야 한다는 목표 앞에 날카롭게 벼려졌다. 예민해진 눈에 적의 움직임이 물속을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느려 보였다.
가장 먼저 달려든 두 놈을 손쉽게 벴다. 그다음으로 각각 내 목과 가슴, 허리를 노린 칼들을 차례대로 쳐올리고 난 후, 가장 가까이에 있는 녀석의 배를 깊이 파고들었다. 칼을 뽑으며 재빨리 뒤돌아 다음 녀석의 목을 뒤에서 그었다. 다섯 번째 녀석이 동료들의 죽음을 인지하기도 전에 칼을 심장에 찔러 넣었다. 그러나 둔해진 몸은 마지막 남은 놈의 공격을 빠르게 막아 내지 못했다. 칼날이 왼팔을 찢는 것을 느끼며 놈의 목을 쑤셨다. 상처를 내버려 두고 다시 달렸다.
계속 북쪽으로 향하자 나무가 줄어들고 주변이 밝아졌다. 숲을 빠져나오자 절벽이 나를 기다렸다. 한시도 늦춘 적 없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깎아지른 낭떠러지 아래, 강이 말라 버린 자리를 끔찍한 모양의 바위가 채우고 있었다. 야속한 햇살을 맞으며 두려움을 삼켰다.
머지않아 내 최후를 재촉할 사자들이 검은 숲에서 나타나 나를 둘러쌌다. 혼자 상대할 수 없는 수의 보병과 궁수부대였다. 칼날이 백색으로 번쩍거리고 화살촉이 일제히 나를 겨누었다. 살아남을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마에서 흐른 끈적끈적한 피가 한쪽 눈을 덮었다. 어깨에 화살이 박히고 갑옷은 부서졌지만 마음만은 평온했다. 언젠가 발론 후작은 내가 직선으로만 움직이는 룩 같다고 했지. 나는 전장 위의 룩이다. 체스판에서 중요한 말이지만 킹이 위험하다면 마땅히 희생해야만 한다. 시간을 제법 끈 사이 그레이 질라라드는 안전한 곳으로 도피했을 것이다. 입술 한쪽을 끌어 올려 웃었다. 그거면 됐다.
“학살자 메이킨, 그대는 포위되었습니다. 얌전히 투항하세요.”
한때 스승이던 이가 차가운 목소리로 날 조롱했다. 찢어진 목구멍에서 비린 맛이 나서 피 섞인 침을 뱉었다.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수더리 장군의 냉랭한 어조도, 현 상황에 관한 그럴듯한 진단도, 항복하라는 권유도 아니었다.
“내 성은 질라라드다, 왕가의 개야.”
목소리가 퍽 갈라져 나왔다. 수더리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엄숙하게 내질렀다.
“그리 발악하지 않아도 죗값을 치르게 해 줄 테니 보채지 마십시오.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면 왕가에 무릎 꿇으세요.”
“헛소리 그만하고 죽여라.”
“그러기에는 그대의 죄가 너무 큽니다. 어쩌다 그런 괴물이 되었습니까?”
죄란 말은 낯설게만 들렸다. 난 필요한 일을 했을 뿐이다. 내 군주는 적이 사람이 아니라 쓸모없고 천박한 돼지들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의 말이라면 뭐든 믿었다. 처음에야 불편했지만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게 도살자를 자처했다. 사람을 고깃덩이처럼 썰면서도 죄책감이 들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눈을 감자 까마득한 과거가 머릿속을 채웠다. 나는 장난을 좋아하는 평범한 꼬마였다. 검을 누구보다도 잘 쓰고 싶어 하는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학살자로 죽어 가고 있다.
‘그러게,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뒤늦게 궁금해해 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머리를 가득 채운 것은 오직 그레이 질라라드의 얼굴과 음성이다.
‘네가 필요하다, 달빛검.’
달콤한 말에 나는 그레이의 것이 되었다. 그레이가 필요하다기에 왕이 내린 칼로 왕국을 쪼갰다. 그가 원하기에 스승에게 배운 검으로 스승을 겨누었다. 선봉을 이끌어 아리베스 왕가를 쳤고,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변절자, 학살자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붙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 관심은 오로지 발론 후작을 새로운 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대단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가 원해서였다.
반딧불이처럼 미약한 빛을 내는 내게 그레이는 태양처럼 황홀한 존재였다. 실은 그 이상이었다. 나는 일반적인 기사의 충직을 넘어서서 남자가 여자를 보듯이 그를 탐했다. 내가 저지른 일은 모두 그 반짝이는 검은 보석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 비록 덧없이 끝나 버렸지만.
목을 젖혀 위를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그레이처럼 찬란하고 또한 무심했다. 지난 어느 날 저녁에 책을 읽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달콤함에 잠겼다. 그 시선이 따뜻하지 않아도, 나를 향해 있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는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는 절대자이므로, 내게 살인을 지시하던 손가락조차 빛나는 태양이므로, 존재만으로 족했다. 작게 중얼거렸다.
“반드시 왕이 되십시오.”
왕위에 오른 그레이 질라라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벌레처럼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아리베스 영주들 앞에 선 그는 소름 끼치도록 권위적이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질라라드 문양을 소매와 등에 수놓은 예복을 입었으며 한 손에는 왕의 홀을, 한 손에는 보검을 들었다. 머리에 빛나는 왕관을 쓴 왕의 등 뒤로 발론 기사들이 시립했다.
완벽한 장면에 전율하면서도 기분 나쁜 위화감을 느꼈다. 틀림없이 내가 바라던 바인데, 무엇이 문제일까. 그레이는 태양의 자리에 마땅히 어울리는 남자다. 내 킹은 정당한 권위로 세상을 지배하며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비록 이제 부서질 룩은 곁에 없겠지만.
그 순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불쾌한 감정은 그의 가장 가까이서 영광을 함께 누려야 마땅할 내가 상상 속에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가 언젠가 왕이 된다고 해도 나는 곁에 없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까.
불만은 없고, 불만을 품어서도 안 된다. 킹을 지키는 것은 룩의 직무이다. 그래서 나는 그레이를 도주시키고 남아서 적병을 유인하고, 사명감에 휩싸여 달렸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죽어서라도 그를 살린다면 만족한다고 미소 지었다.
그럼에도 문득, 작지만 중요한 의문이 고개 들었다. 그건 더 사소하고 감정적인 문제였다. 나는 긴 시간 동안 그레이와 함께했지만 그가 남을 위해 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런 그가 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슬퍼하기는 할까?
조그마한 불편함이 심장에 박혀 들어 점점 크게 번지기 전에 서둘러 잘라 냈다. 물론이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데. 그는 내 진가를 알아보고서 나를 발론으로 불러왔다. 내가 필요하다고 진실하게 고백했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내가 그의 휘하에 들어와 기쁘다고 말했다.
고개를 저으며 의구심을 흩어 냈지만 내 확신은 불완전했다. 미처 틀어막지 못한 틈새로 불안이 쏟아졌다.
아리베스 사람들은 발론 후작에게 심장이 없다고 했다. 그 냉혈한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서 더 특별하게 대하지 않았다. 나는 다정한 말 한마디, 따뜻한 미소 한번 얻고자 찾아간 그의 천막에서 늘 아리베스의 들을 불태우고 아리베스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시가 아닌 말을 들은 기억은 너무 오래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레이를 변호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단순한 부하는 아니다. 발론 후작의 엔슬리 메이킨. 엔슬리 메이킨의 발론 후작. 비록 악명으로 점철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세상이 알아주는 한 쌍이다. 내가 그에게 가장 특별한 사람인 거야 온 세상이 알았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훨씬 느리게 진행되었거나. 겁 없이 돌격해 전장을 적군의 시체로 뒤덮고 선봉에서 적의 영토를 점령하던, 나를 대신할 자는 찾기 힘들었을 테니.
그러니 적어도 나는 그의 가장 특별한 도구다. 가장 특별한 도구. 비로소 적합한 표현을 찾아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착각 같은 열정이 걷히자 비로소 진실이 보였다. 내가 죽고 나면 그레이는 그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 부서진 것을 유감스러워하며 내 빈자리를 대체할 기사를 찾아볼 것이다. 나는 그레이를 가지려고 숱한 희생과 대가를 치렀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레이는 내 영혼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단지 내 무예를 이용한 야심가일 뿐이었다. 외면해 온 진실은 절벽 아래 나를 기다리는 바위만큼이나 차갑고 날카로웠다.
“끝까지 투항하지 않을 모양이군. 적장을 생포하라!”
수더리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올가미 든 병사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내가 너희를 왜 죽여야 하지? 내가 왜 죽어야 하지?’ 그만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이 저절로 칼을 들었다. 사람 베는 감각을 버릇처럼 기억하는 검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꺼지기 직전에 가장 크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죽음의 목전에서 칼춤을 추었다. 잘못되었다. 다 잘못되었다. 끝없이 밀려드는 병사들과 함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 쏟아졌다.
‘저들을 모두 죽여야 합니까?’
‘본을 보여야 한다.’
‘투항한 자들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레이 님.’
‘모조리 묻어라.’
그레이는 오백 명이 넘는 포로를 구덩이에 쏟아 넣으라고 명했지만 나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매달려도 사령관은 명령을 거두지 않았고, 포로들은 머리가 흙으로 덮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원망했다.
줄 듯 주지 않는 애정에 허덕이며 몇 놈을 저세상으로 보냈나. 뒤늦게 그레이를 대신해서 죽인 자들을 곱씹으며 후회했지만 너무 늦었다. 내 손과 칼은 이미 피로 진하게 물들었다. 칼끝으로 참혹한 기억을 베어 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레이 님, 나는 아리베스에 충성을 서약한 기사입니다. 그리 쉽게 왕가를 배반할 수는 없어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 아리베스와 질라라드, 한쪽을 선택하는 것뿐이야. 넌 언제나 질라라드가 되고 싶어 했잖니.’
기억은 아리베스를 배반하며 손가락을 자른 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레이는 내가 그를 돕기만 하면 질라라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질라라드는 내게 빛나는 유년이자 훌륭한 핏줄이었으며 그레이와 대등하게 설 수 있는 발판이었다.
나는 언제나 질라라드가 되고 싶었지만 끝내 메이킨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헛된 이름에 집착하며 자행한 일을 후회했다. 검을 휘둘러 내가 한 번도 갖지 못한 혐오스러운 이름을 베어 냈다.
‘사생아, 엔슬리 메이킨을 발론에서 추방한다.’
‘불가합니다. 저 또한 후작 각하의 자손입니다.’
‘고인을 욕되게 하지 마라. 더는 듣지 않겠다.’
열일곱, 발론에서 추방당한 날을 떠올렸다. 그레이 질라라드는 부친의 작위를 승계하자마자 나를 내쫓았다. 갈 곳 없다고 눈물로 호소해도 소용없었다. 부드럽고 살가운 태도 뒤에 숨겨진 그의 본질은 냉정하고 잔혹했다.
그의 실체를 꿰뚫어 보지 못한 내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칼을 들어 내 고향 발론과 질라라드 가문을 향한 미련을 베어 냈다.
‘당신의 거짓말 때문에 그 애가 죽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엔시? 넌 그 애가 멍청하게 숲으로 떠날 줄 알았잖아.’
‘롯시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어요. 만일 그리될 줄 알았다면…….’
‘내 탓 하지 마. 네가 죽인 거야.’
마지막으로 흐릿한 형상이 떠올랐다. 본 지 너무 오래되어 기억 속에서 왜곡되었을 얼굴이었다. 내 죄악의 시작, 롯시. 그 가엾은 애는 그레이를 향한 내 철없는 호감 때문에 희생되었다.
나는 핏줄마저 도외시할 정도로 맹목적이던 지난날의 동경을 후회했다. 내 두 눈을 가리며 나를 잘못된 길로 이끈 열정을 무거워진 검으로 베어 냈다.
까마득히 아래 침잠한 기억마저 끄집어내 베고 나니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내가 벤 자들의 시신이 쌓여 있지만 의미 없는 살인이었다. 나를 포위한 병사는 여전히 숨 막히도록 많았다. 몸은 땀에, 손은 핏물에 젖었다. 비틀거리면서도 검을 앞으로 겨누었지만 이처럼 어지럽게 흔들리는 칼끝으로는 무엇도 벨 수 없다.
“서 있을 힘도 없는 것 같군요. 마지막 기회입니다. 투항하세요.”
나는 상했을지언정 반란군의 가장 화려한 앞잡이, 발론의 제일가는 말이었다. 놈들은 날 고문해 기밀을 토설하게 한 뒤 커다란 광장에서 처형할 것이다. 절벽을 향해 뒷걸음질 치자 병사들이 주춤하며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수더리가 동요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는 정 많은 사람이었다. 옛 제자가 원수로 변했다고 해도 당장 내 죽음을 눈앞에 두니 오래전 검을 가르치던 순간이 떠올랐을 것이다. 수더리는 칼을 내리며 급하게 말했다.
“뭐하는 겁니까? 멈추세요!”
대답하는 대신 또 뒷걸음질 쳤다. 한 걸음만 더 가면 까마득한 골짜기로 떨어질 위치에 다다랐다. 조금 주저하다가 게임의 규칙대로 뒤로 무게를 실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는 병사들이 멀어지고, 수더리의 고함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몸뚱이가 아래로 떨어지며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눈을 감자 길지 않았던 인생이 연작 그림처럼 펼쳐졌다. 사람의 삶을 얼마나 행복했는지로 평가한다면 형편없는 인생이었다. 어린 시절엔 사생아라고 멸시당했고, 추방당한 뒤에는 떠돌이 용병생활을 하며 쓰레기처럼 연명했다. 이 악물고 기사가 된 뒤에도 추방자라는 족쇄를 벗어나지 못했다.
검은 상에 그레이의 얼굴이 맺혔다.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맺혔다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내내 갈증 나던 삶의 해답이 그라고 확신했지만 판단은 틀렸다. 그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친 끝에 남은 건 싸늘한 죽음뿐이다.
‘훌륭하다, 엔슬리 메이킨. 좆 같은 인생을 살았구나.’
죽어 가는 짧은 순간에 비로소 내 삶이 후회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악다물었다. ‘기회가 한 번만 더 있다면 이렇게 살지 않을 텐데.’ 의미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졌다. 위화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목에 찬 아뮬렛 속에서 빛이 꿈틀거렸다.
‘누구나 미래를 바꿀 힘이 있단다. 아무나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이건 보답이란다. 네가 모르는 것들을 알게 될 마지막 날에 필요할 거야.’
까마득한 과거에 누군가 준 삼각형 목걸이가 빛을 내뿜었다. 날카로운 바위에 꿰이기 전에 몸이 붕 떴다. 갈라지는 소리가 나며 펜던트 내부에서만 요동치던 빛이 바깥으로 뻗어 나갔다. 무심코 눈을 감았는데도 주변이 너무 밝아서 얼굴을 찌푸렸다. 빛은 강렬하다 못해 부피가 있는 것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것과 내 존재를 씻어 나갔다.
 
 
1부
 
 
Chapter1. 질라라드
 
 
빛.
“좋은 아침, 엔슬리.”
눈을 감고 있는데도 빛이 너무 강해서 손으로 눈두덩을 가렸다.
“어서 일어나렴. 한 달 전부터 이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고 노래했잖아.”
주변을 둘러싼 소음이 또렷해져 말소리로 들렸다. 눈을 살짝 떠 보니 빛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았다. 열어 놓은 창 사이로 햇살이 새어 들어왔고 얇은 커튼 자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손을 움직이자 푹신한 천이 손끝에 닿았다. 나는 부드러운 곳에 등 붙이고 있었다. 천장과 벽은 온통 어두운 회색 빛깔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알아내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고를 방해했다.
“당장 그 무거운 궁둥이 들어 올리시지? 기사는 부지런해야 하는 거 몰라?”
‘감히 날 훈계하다니, 제정신인가?’
화나기 이전에 놀라워서 여자를 자세히 보았다. 나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하녀가 군중에 있을 리 없는데, 이상하게도 얼굴과 목소리가 익숙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기억 깊이 가라앉아 있던 이름이 떠올랐다. 당혹감이 일었다.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지만 그 이름을 내뱉었다.
“미리아?”
“왜 그렇게 다정하게 부른대? 징그럽게.”
몸을 거칠게 일으켜 바닥을 디뎠다. 그리고 여자가 날 위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오래전 발론에서 추방당할 적에 함께 내쫓긴 하녀가 곁에 있는 것이 문제인가, 그녀가 여전히 젊어 보이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그녀의 이름을 내뱉은 내 목소리가 낯선 것이 문제인가.
모조리 문제였다.
양손을 올려 뚫어지도록 보았다. 그레이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자른 왼쪽 새끼손가락이 성했고, 마디마다 박인 굳은살은 흔적도 없었다. 수선화 줄기처럼 여리고 깨끗한 손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부드럽고 고생 모르는 듯한 발은 원래 크기의 반만 했다.
“말도 안 돼.”
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한 목소리가 끔찍하게 낯설었다.
“그럼. 발론에서 제일가는 잠꾸러기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다니, 말도 안 되지.”
미리아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방을 샅샅이 살폈다. 커다란 마호가니 탁자는 한쪽 모서리를 땜질해 놓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선대 발론 후작이 선물로 내린 코끼리 상아가 얼마나 단단한지 실험하다가 그리되었다. 탁자 위에는 영 읽지 않아서 새것처럼 보이는 역사서 몇 권과 고급 필기구가 놓여 있었다. 커다란 액자로 장식한 내 초상화가 벽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바닥에는 후작이 사냥한 짐승 가죽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실물을 본떠 만든 장난감 성과 나무를 깎아 만든 병사 조각이 어지럽게 널렸다.
침대 옆에 비스듬히 놓인 검집을 들어 검을 뽑았다. 후작이 좋은 철이 나는 고장에 친히 주문해 지은 내 첫 진검의 이름은 ‘송곳니’였다. 방 곳곳에 그가 사생아를 총애한 흔적이 묻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수련이라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그래도 물 떠 온 성의가 있는데 세수부터 하지그래?”
검을 놓고 미리아에게 다가갔다. 그 여자는 추방당할 적에 정수리가 내 어깨쯤 왔는데, 지금은 나와 키가 비슷했다. 그녀 손에서 놋대야를 빼앗아 들었다가 물에 비친 얼굴을 보자마자 떨어뜨리고 말았다. 넓은 대야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돌바닥을 구르고 미지근한 물이 발을 적셨다. 미리아가 손바닥으로 등을 찰싹 쳤다. 손이 제법 매워서 몸이 움찔거렸다.
“하여튼 일을 두 번씩 시킨다니까! 물을 새로 받아 올 테니 얌전하게 기다려.”
그녀가 나간 뒤에 얼굴을 마구 더듬었다. 벽으로 달려가 접시에 비친 꼬마를 보았다. 혈색 좋은 얼굴 위로 연갈색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었다. 크게 뜬 눈은 진한 녹색이었다. 입은 턱이 빠질 것처럼 벌어졌다. 마주 보는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지며 내 심정을 반영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나다. 이십여 년 전 모습인 것이 문제지만.
“빌어먹을, 이게 무슨 상황이지?”
더보기

이벤트[이벤트] 할리퀸 신작 UP!

구매 - 화당 5,000캐시. 무제한 이용.

모두 선택
선택 해제
지불할 금액:0 E-캐시
지불

로그인 후 이용하세요.

패키지[필독] 이영란 - 너무너무 신선한 러브 코미디

리뷰

리뷰 쓰기

리뷰

아직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